아침부터 내린 비는 지짐거렸다. 작달비는 아니지만 금세 옷이 젖을 만큼 내렸다가는 이내 그치고 개었다가는 다시 보슬비로 내렸다. 비 맞는 앞산 머리가 운무(雲霧)로 그윽하다. 종일토록 흐린 날이 될 것이라는 징후(徵候)다.
지짐거리다. : 조금씩 내리는 비가 오다 말다 하다.
작달비 : 굵고 아주 거세게 내리는 비
보슬비 ; 바람이 없는 날 가늘고 성기게 조용히 내리는 비
생량(生涼) : 가을이 되어 서늘한 기운
술꾼들은 자기 안에 감춰진 슬픔을 불러내는 비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면서 더 큰 슬픔에 몸을 맡긴다. 모든 비는 똑같이 술비다. 길 가는데 어찌 맑은 날만 바라랴. 시월의 첫날 날은 흐리고 습도(濕度)는 높아 후덥지근하지만, 노랗게 물든 들녘의 나락은 실하게 익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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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면 조그마한 동산 하나가 버디재 관문처럼 객을 맞는다. 모양새가 사발 가득 올려진 감투밥을 닮아 밥봉이라 부르기도 한다. 밥이 권력(權力)이고 밥이 목숨줄이었던 시절 굶주린 배는 산도 밥처럼 보였으리라. 골퍼들의 귀가 솔깃해질 버디재는 예전에 이곳에 버드나무가 많았다는 데서 유래(由來)한다. 길가 대봉은 낮술에 취한 듯 볼그레 하고 밤송이 속의 아람은 누렁이 암소의 선한 눈망울을 닮았다.
목숨 : 살아가는 원동력, 숨을 쉬는 힘
목숨을 도모하다. : 죽을 지경에서 살 길을 찾다.
아람 : 밤이나 상수리 등이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진 것 상태
도모(圖謀) : 어떤 일을 이루려고 수단과 방법을 꾀함
감투밥 : 그릇 위까지 수북이 담은 밥
고깔밥 : 밑에는 다른 밥을 담고 그 위에 쌀밥을 수북이 담은 밥
뚜껑밥 : 겉으로만 많이 보이게 접시 따위를 깔고 그 위에 놓은 밥
꽃은 감꽃이 밤꽃보다 먼저 피는데 열매는 밤톨이 먼저 떨어진다. 피고 지는 가치(價値)가 인간사(人間事)와 같겠는가마는 자연(自然)도 때로는 공평(公平)을 외면(外面)하는가 싶다. 여름꽃이 진 길옆 도랑엔 물 봉선화(鳳仙花)가 흐드러지고 쑥부쟁이도 하얀 미소(微笑)로 반긴다. 버디재는 높지 않고 가파르지 않은데다 숲이 짙어 서늘하고 호젓하다. 뒹구는 날짐승의 깃털 하나를 주워 도가머리인 양 모자에 꽂는데 숲 저만큼서 휫바람 새가 웃는다.
자전거 바퀴살로 물레방아를 만들고 진돗개 형상(形象)의 나무 조각(彫刻)까지 세워 놓은 물레방아집은 웬만한 설치작품(設置作品) 이상(以上)이다. 박한수 할아버지가 만든 작품(作品)인데 할아버지는 여행객(旅行客)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도 식수(食水)를 받을 수 있도록 한데우물을 만들고 화장실(化粧室)을 밖으로 냈다.
도가머리 : 새의 머리에 길고 더부룩하게 난 털, 머리털이 부스스한 사람
한데우물 : 집 울타리 밖에 있는 우물
짧은 시(詩)에서 먼 길을 돌아온 늘그막 인생(人生)의 관조(觀照)가 배어난다. 할아버지의 삶은 아둔한 길손에게 주는 또 하나의 깨달음이다.
길손 : 먼 길을 가는 나그네
아둔하다 : 슬기롭지 못하고 머리가 둔하다.
서당마을로 내려오는 길에 맞은바라기의 남해 뒷산이 아득하다. 저수지(貯水池)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들이 모여 거울처럼 맑은 하늘을 비추고 왼쪽으로는 지나왔던 들녘에서 가을이 황금(黃金)빛으로 익어가고 있다. 산촌마을 회관(會館) 앞길에 서면 가야 할 치받이 길은 된비알로 일어서고 운무(雲霧)가 걸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산자락은 까마득하다. 능선(稜線) 마루를 넘는 길이다.
치받이길 : 비탈진 길에서 올라가는 방향으로 난 길
된비알 : 몹시 험한 비탈
* 전망(展望)은 없고 바람도 없는 숲길 된비알은 정말 싫다.
맞은바라기 : 앞으로 바로 보이는 곳 = 맞바라기
돌비알 : 깎아 세운 듯한 돌의 언덕
등줄기를 타고 내리던 뜨거운 땀줄기가 바짓가랑이를 타고 서늘하게 흐른다. 비와 땀이 혼재(混在)한다. 숲은 무겁고 적막(寂寞)하다. 깊은 숲에서는 여행자(旅行者)도 한 마리의 작은 숨탄것일 뿐이다. 그 숲이 여행자(旅行者)를 품는다. 숲은 작은 한숨 하나라도 외면(外面)하지 않고 말없이 받아들인다. 말 없는 위로(慰勞)가 좋다.
숨탄것 : 생명을 가진 동물의 통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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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안겨 산의 위로(慰勞)를 받으며 해찰 부리지 않고 걸으면 해껏에는 대축마을에 닿을 것이다. 먹점재를 넘어 30분쯤 가면 발아래에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風景) 하나가 느닷없이 눈에 들어와 발길을 멈추게 한다. 섬진강(蟾津江)이다. 모래가 많아 다사강(多沙江) 또는 사강(沙江)이라고 불렸던 섬진강의 모래톱이 하얀 살을 드러낸 채 잔비에 젖고 있다. 이 모래톱은 평사리 공원(公園)이다.
해찰 :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쓸데없는 다른 짓을 함, 마음이 내키지 않아 부질없이 집적거려 해침
잔비 : 가랑비
삽(霎) : 가랑비, 빗소리
는개 : 안개보다는 굵고 이슬비 보다는 가늘다.
이슬비 : 는개보다는 굵고 가랑비 보다는 가늘다.
가랑비 : 이슬비 보다는 굵게 내리는 비
해껏 : 해가 질 때까지. 그는 날마다 해껏 일한다.
길은 섬진강 풍경(風景)을 뒤로 하고 가던 길에서 벗어나 오른쪽 비탈길로 가파르게 오른다. 주목(注目)받지 못한 삶의 회한(悔恨)일까? 오르는 길에 주은 똘배는 입안에서 오랫동안 서걱대며 쉽게 몸을 풀지 않았다. 오늘 밤 민박(民泊)집에서 막걸리 안주가 되어 전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에게도 지난 여름의 햇발은 힘들었을 테다. 비에 젖은 가을 산은 5시가 넘자 사위(四圍)에 해거름의 어둑발이 깔린다.
서걱이다 : 무엇이 스치거나 밟히는 소리가 잇따라 나다.
서걱서걱 : 눈이 내리거나 눈을 밟을 때 나는 소리, 연한 과자 배 사과를 씹을 때 나는 소리
사위(四圍) : 사방의 둘레
해거름 : 하루 해가 지나감, 해가 서쪽으로 넘어감, 넘어가는 시간
어둑발 : 땅거미. 사물을 잘 구별(區別)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빛살
일모도원(日暮途遠)이라 했던가? 해는 지고 갈 길은 멀다. 포장(鋪裝) 임도(林道)를 타고 서둘러 오르는데 그만 길이 끝나고 말았다. 길을 잘못 든 것이다. 임도(林道)를 따라 관성(慣性)으로 걷다가 숲길로 접어드는 표시(標示)를 미처 보지 못했다. 그래도 길을 잃은 덕에 똘배를 만났으니 탓할 일만은 아니다. 가던 길을 되돌아 와 들어선 숲길은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열병(閱兵)하듯 늘어서고 솔가리 수북이 깔린 길은 발의 피로(疲勞)마저 잊게 한다.
아름드리 : 둘레가 한 아름이 넘는 큰 나무 등(아름드리 나무)
홀로 걷는 숲길에서 아람 벌어진 밤나무가 헛기침하듯 가끔씩 열매를 떨궈 적막(寂寞)을 깨뜨린다. 숲길이 끝나는 지점(地點)에서 또 한 번의 풍경(風景)이 눈길을 붙잡는다. 토지(土地)의 무대(舞臺)가 되었던 평사리 황금(黃金) 들녘과 들녘 너머로 운무(雲霧)에 쌓인 지리산 능선(稜線)이 한눈에 들어온다. 펼쳐진 능선(稜線)의 운무(雲霧) 속으로 들어서면 금방(今方)이라도 신선(神仙)이 될 것만 같다.
아람 : 밤이나 상수리 등이 충분히 익어 저절로 떨어진 것이나 그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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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게 물든 평사리 들녘이 비이슬을 머금은 채 기지개를 켜고, 마을로 내려왔던 산안개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기고 있다. 비는 유리창을 두드려 일잠에 든 길손을 깨우고 산안개는 마을 앞 개울에서 뒤척였다. 샛강으로 흐르는 물은 섬진강(蟾津江)에 닿기 직전 긴 호흡(呼吸)을 고른다.
일잠 : 저녁에 일찍 잠
샛강 : 큰강의 본류(本流)에서 물줄기가 갈라져 나가서 가운데에 섬을 이루고 하류(下流)에서 다시 본류(本流)에 합쳐지는 지류(支流)
비이슬 : 비와 이슬, 비가 내린 뒤 맺힌 이슬
길손 : 먼 길을 가는 나그네
길은 다시는 만나지 않을 듯 앵돌아서 제 갈 길로 간다. 가는 길에 소설(小說) 속 최치수를 만나거들랑 그토록 외롭고 깐깐하게 지키고자 했던 가치(價値)는 무엇이었더냐고 물어볼 터다. 최 참판(參判)의 허망(虛妄)한 가치와는 달리 평사리 들녘은 변함없는 생명(生命)의 가치(價値)로 가득하다.
앵돌다 : 홱 토라지다.
참판(參判) : 조선시대(朝鮮時代), 육조(六曹)의 종이품(從二品) 벼슬을 이르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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